만희복지재단 박형만 이사장 인터뷰…"남 도울 때 보약 먹은 듯 기운 얻는다"
“LA에서 처음 샀던 한인타운 아파트가 지금은 70유닛 신축 건물이 됐어요. 이 아파트는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만희복지재단에 귀속돼 나와 아내가 죽어도 기부 활동을 이어나가는 마중물이 되게 했습니다.” 지난 12일 한국 공주대학교에서는 만희복지재단 박형만(87) 이사장 명예경영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공주시와 충청남도, 공주대 여러 인사들은 박 이사장 학위 수여식에 참석해 박수를 보냈다. 공주 지역 사람들은 매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고향 발전기금을 내놓은 박 이사장에게 진심이 담긴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공주가 낳은 기부천사 ‘쓰리 박(박형만·박찬호·박세리)’으로도 불린다. 박 이사장은 지난 13일 공주시청을 찾아 소년소녀가장, 장애인,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 40여 명에게 1인당 100만 원씩 지원했다. 28년째 이어온 박 이사장의 뚝심 있는 고향 사랑이다. 그가 고향 사람들을 돕는데 앞장서는 이유는 ‘지독했던 가난과 사무친 서러움’ 때문이다. “나는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당시에는 전부 다 가난했을 때죠. 12~13살 때 공주에서 느꼈던 배고픔이 잊히지 않아요. 공주 본토박이로 어려운 고향 이웃을 돕고 싶었어요.” 박 이사장은 27살 때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자퇴해야 했다. 가난해서다.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공주농업고등학교에서 아이들 축구를 가르치다 파독광부를 자원한다. 1964년 독일 에센 지역 지하 1000미터에서 3년 동안 석탄을 캤다. 박 이사장은 석탄만 캐지 않았다. 독일인의 근면성실을 엿보며 “인생을 재생했다”고 했다. 그는 “독일인은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거짓이 없었다”며 “그곳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배웠다. 8시간 석탄을 캔 뒤 주변 농장에서 부업까지 일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독일 파독 간호사였던 이숙희(86)씨와 가정을 꾸렸다. 부부는 1967년 LA 이민 후 본격적인 자수성가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남편 박 이사장은 주방 설거지, 구두 수선, 정원 관리사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아내 이씨가 간호사로 번 돈은 차곡차곡 종잣돈으로 만들었다. 1972년 LA한인타운 12유닛 아파트로 시작한 부동산 투자 등 악착같은 노력은 반세기 후 박씨 부부를 부호로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박형만 이사장 부부가 ‘짠돌이’라고 놀리기도 한다. 박 이사장도 웃으며 인정한다. 그는 “사람들이 내가 유대인처럼 돈을 안 쓴다고 말한다”면서 “돈을 쓸 곳과 안 쓸 곳을 분명히 알고 실천해야 하는데 이는 교만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세속적인 돈 쓰기를 거부한다. 대신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이웃을 위해서는 기꺼이 돈을 내놓는다. 그는 28년째 고향 공주의 어려운 이웃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10년째 홈리스 30여 명에게도 매해 1000달러씩 지원하고 있다. 5년째 할리우드 LA 어린이 병원에도 기부를 한다. 지난 6월에는 LA한인타운 시니어&커뮤니티 센터에서 지역사회 취약계층 40여 명에게 총 5만 달러를 지원했다. 만희복지재단에 따르면 박형만·이숙희 부부의 공주와 LA 지역사회에 환원한 돈은 130만 달러에 이른다. “28년 전 처음 고향 기부를 시작할 때 ‘내가 잘하는 건가…’ 처량한 생각도 했어요. 이코노미 타고 가서 고향 분들을 만났는데, 한 할머니께서 ‘월동할 돈 걱정하지 않게 됐다’며 우시는 겁니다. 아, 내가 진짜 잘하고 있구나! 싶었죠.” 박형만 이사장은 마음속 ‘울림’을 따른다고 강조한다. 돈을 더 벌어서 남을 더 돕고 싶다고 마음먹었고, 베풀면 베풀수록 사업과 일이 더 잘 풀렸다고 한다. “남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는 현장입니다. 남을 도울 때 보약을 먹은 것처럼 ‘기’도 얻어요. 시골 가난한 집 10남매 막내로 태어나 가난을 뒤집은 만큼, 이웃을 위해 손을 더 내밀고 싶어요.” 김형재 기자박형만 이사장 이사장 명예경영학박사 이사장 학위 한국 공주대학교